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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chive/일기

’ヒロアカ’가 내게 준 선물: 스토익한 의지

by 우땅 2026. 3. 16.

'ヒロアカ'를 보고 있으면 가슴 한구석이 저릿해질 때가 많다. 내 인생의 애니메이션이라고 부르기에 주저함이 없는 이 작품을 보며, 요즘 문득문득 드는 생각들을 정리해 본다. 유독 내 마음에 깊이 박혀서 떠나지 않는 대사가 하나 있다. 모든 이야기의 시작점이었던 그 순간, 올마이트가 미도리야에게 했던 말이다.

 

 

"そうさ!あの日誰もない小心者無個性の君だったから私は動かされた"
(그래! 그날 그 누구도 아닌, 소심하고 무개성이었던 너였기에 나는 움직여진 거다.)

 

 

 

그 자리에서 가장 약하고 아무것도 없었지만 그 자리에 가장 먼저 달려나갈 수 있었던 그 마음. 그 역설적인 순간이 이 긴 이야기의 시작이었다는 게 나는 참 좋다. 문득 데쿠와 올마이트를 보며 스토아학파의 철학자 에픽테토스의 말이 떠올랐다.

 

우리에게 달려 있는 것과 달려 있지 않은 것을 구분하라.

 

무개성이었던 미도리야가 비웃음 속에서도 히어로 노트를 채우고, 바쿠고를 구하기 위해 몸이 먼저 나갔던 건 그에게 '개성(본인에게 달려 있지 않은 것)'은 없었지만 '구하고자 하는 의지(본인에게 달려 있는 것)'가 있었기 때문이다. 올마이트가 움직인 지점도 바로 그 '의지'의 영역이었다고 할 수 있다.

스토아 철학에서는 인간을 완성된 존재가 아니라 끊임없이 미덕을 향해 나아가는 존재 'Prokopton(진보하는 자, 수련)'이라고 부른다. 바쿠고나 아오야마 유가, 심지어 빌런들까지도 이 관점에서 보면 단번에 재단될 죄인이 아니라, 각자의 고통 속에서 길을 잃었거나 혹은 다시 올바른 길로 복귀하려 애쓰는 '나아가는 존재'들인 셈이다. 타인의 잘못에 분노하기보다 그들이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그 무지를 안타까워하고, 다시 미덕을 선택할 기회를 주는 것. 그것이 스토아 철학이 말하는 진정한 이성적 태도이자, 이 만화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진정한 히어로의 모습이 아닐까 싶다. 물론 너무 기회를 주며 악역 미화? 라는 오명이 붙는거 같아서 안타깝긴 하지만 작가가 바란건 미화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 만화는 동양과 서양이 참 묘하게 섞여 있다. '기간토마키아'니 '타르타로스'니 하는 신화 속 이름들을 가져온 것도 그렇지만, 캐릭터들이 가진 마인드가 서구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큰 죄를 지은 아오야마 유가를 대하는 방식이 그랬다. 보통 우리네 동양 문화, 특히 더 엄격한 중화권 문화였다면 한 번 배신자는 영원한 죄인으로 낙인찍혀 다시는 일어서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만화 속 친구들은 달랐다. 죄책감에 짓눌리게 하기보다, "다시 기회를 줄게, 새로 시작하자"며 손을 내밀어 줬다. 그 장면이 동양 문화권에선 정말 보기 드문, 그래서 더 귀하고 멋진 장면으로 다가왔다. 이런 자연스러운 문화적 융합이 이 작품을 기네스북에 오를 만큼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게 만든 힘이 아닐까 싶다. 

학교폭력 가해자였던 캇짱도 마찬가지다. 어떤 사람들은 '캐릭터 세탁'이라고 비판하지만, 나는 그가 자신의 잘못을 뼈저리게 인정하고 더 나은 인간이 되려고 발버둥 치는 모습이 좋았다. 한 번의 잘못으로 영원히 죄인 취급하는 게 아니라, 인간은 변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것 같아서. 데쿠를 인정하고, 또 그와 함께 강해지려 애쓰는 그 모습을 응원하게 됐다.

빌런들도 그렇다. 시가라키 토무라가 저지른 짓들은 용서받기 힘든 최악의 악행이지만, 그의 과거 '시무라 텐코'의 이야기를 알고 나면 마냥 미워할 수가 없다. 어른들에게 철저히 이용당하고 방치되었던, 구원받지 못한 어린아이. 결국 치유받지 못한 채 최악의 삶을 살게 된 그가 너무 안타까웠다. 그래서인지 마지막까지 그 내면의 울고 있는 아이를 구하려고 애쓰는 데쿠의 모습이 더 깊이 박혔다.


그래서 결말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은 걸 보면 좀 안타깝다. 주인공이 능력을 다 잃어버렸는데 그게 무슨 주인공이냐는 사람들을 보면, 나와 같은 만화를 본 게 맞나 싶기도 하고. 나는 오히려 그 결말이 좋았다. 호크스가 말한대로, 히어로가 한가한 세상. 그래서 특별한 히어로 한 명이 바쁘게 뛰어다니지 않아도 되는, 조금은 '한가한' 세상. 미도리야가 능력을 잃어도 아무 상관 없는 그런 세상이 드디어 온 거니까. 모두가 꿈꾸던 세상이 그런 모습 아닐까. 너무 눈에 보이는 능력에만 집착하는 시선들이 조금 아쉽다. 평화의 상징으로 군림하려고 했던 올마이트가 정말 바라던 세상이 바로 이즈쿠가 가져온 세상 아닌가.

프레젠트 마이크와 에리의 대화. 스토익이라는 단어가 나온게 갑작스럽다고 보일 수 있지만, 작품 전반적인 주제를 한 단어로 요약한다면, 이렇게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마지막 시즌, 성큼 자란 에리짱이 U.A. 고교에 방문해서 프레젠트 마이크와 대화하며 천진하게 "うんっ すといくなの (응, 스토익해!)"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 짧은 대사가 왜 그리 오래 잔상에 남았는지 이제야 알 것 같다. 물론 에리짱의 첫 공연이니 만큼 다른 도움은 받지 않고 스스로에게 엄격하게 한다는 맥락에서 해석하는 게 더 맞지만, 만약 엄격하다고만 할 거였으면 스스로에게 엄격하네~ 라고 했었을 대사를 스토익하네! 라고 하는 걸 보면 이 문장에 작가님이 말하고 싶은 내용이 담겨있었다는 생각을 한다.

스토아 철학에서 말하는 행복은 외부 환경에 휘둘리지 않고, 오직 내가 통제할 수 있는 '나의 의지'를 바르게 세우는 데 있다. 에리는 과거의 끔찍한 기억을 지울 순 없지만, 오늘 하루 최선을 다해 노래 부르는 '선택'을 한다. 데쿠 역시 능력이 있든 없든 누군가를 돕겠다는 '의지'만큼은 한 번도 놓지 않았다.

결국 히어로란, 거창한 초능력을 가진 존재가 아니라 주어진 비극 앞에서도 나아갈 방향을 스스로 결정하는 '스토익한 의지'를 가진 사람을 뜻하는 게 아닐까. ヒロアカ의 인물들이 말하고 있었다. 세상은 네 뜻대로 되지 않을지 몰라도, 네 마음만큼은 네가 결정할 수 있다고.


나는 이즈쿠의 여정을 보며 스토아 철학을 온몸으로 살아내는 구도자의 모습을 보았다.

"인생의 운명은 이미 주어졌지만, 현재의 내 마음가짐은 나에게 달려있다."

 

이것이 이 긴 이야기의 처음이자 끝이었다. 만약 이즈쿠가 무개성이었을 때 히어로 분석을 포기했다면? 바쿠고를 구하기 위해 몸이 먼저 나가지 않았다면? 그 자리에 올마이트가 있었다 한들, 원 포 올의 기적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이 모든 전개는 이즈쿠라는 소년이 가진 '히어로의 본질'이 불러온 필연이었다.

최강의 능력을 얻었을 때도, 그리고 시가라키 토무라와 싸우며 그 능력을 다시 잃었을 때도 이즈쿠는 변하지 않았다. 다시 무개성이 되었어도 그는 운명을 탓하거나 후회하지 않는다. 오히려 최선을 다했음을 인정하고, 그 눈부셨던 시간을 '행복했던 꿈'이라 부르며 미소 짓는다. 후회나 자책하지 않고,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들에 다시 집중하며 살아가는 것. 능력이 있든 없든 그는 여전히 히어로다. 이 지독하리만큼 담담하고 성숙한 태도야말로 ヒロアカ가 나에게 남긴 가장 큰 선물이라고 생각한다.

 

이런저런 생각 끝에 결국 일본어 원서를 샀다. 아직 만화를 물 흐르듯 읽을 실력은 아니지만, 번역된 글자 말고 주인공들의 진짜 목소리를 직접 느껴보고 싶었다. 더듬더듬 읽어가며 마음에 드는 대사들을 외우는데, 그게 참 즐겁다. 나 역시 내 삶의 히어로로서,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들에 집중하며 담담히 걸어가고 싶다.

비판 없는 명작은 없다지만, 히로아카만큼은 그 가치가 저평가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2025년 기네스북 등재라는 기록이 증명하듯, 이 작품은 이미 수많은 사람에게, 아니 최소한 나에게 '더 나아갈 힘'을 주었으니까. 나에게 주어진 운명이 무엇이든, 그것을 대하는 내 마음만큼은 나만의 것이라는 사실을. 이토록 여운이 깊고 행복한 애니메이션을 만날 수 있어서 참 다행이다.